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아우슈비츠-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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== 폐쇄와 해방 == ||<table align=center><nopad> [youtube(6AQ3iORB0m4)] || || 해방 직후 소련군에 의해 촬영된 아우슈비츠 내부의 참상.[br]시체가 많이 나오니 시청할 때엔 주의를 바란다. || >전쟁 전까지 나는 음악인 집안에서 자랐어. 특히 독일 음악들을 좋아했지. 바흐, 베토벤. 아 위대한 바흐! 하지만 나는 이 사랑하는 이름들을 내 세상에서 지워버렸어. 나중에 화장터를 보여주는데.... 아우슈비츠 수용소 말이야.... 아, 산더미처럼 쌓인 여자 옷가지며 아이들 장화... 회색 잿더미.... 그 재들을 들판으로 내가서 양배추에 뿌리고.... 상추에 뿌렸다는 거야.... 정말이지 더 이상 독일 음악을 들을 수가 없더라고.... 내가 다시 바흐에게 돌아가기까지, 모차르트를 다시 연주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걸렸어. >---- >아우슈비츠 해방에 참가했던 소련군 여군 아글라야 보리소브나 네스테루크,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중에서 1943년 11월 라인하르트 작전이 중지됨에 따라 이 작전의 일부로서 세워졌던 절멸 수용소들은 [[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]]를 제외하곤 모두 폐쇄되었다. 하지만 이 작전으로 세워진 것이 아닌 아우슈비츠는 여전히 나치 최대의 절멸 수용소로서 학살을 자행했고, 다른 지역의 학살 시설이 줄어들어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밀려들자 이들을 수용소에 도착하는 즉시 학살했다. 1944년 말 소련군의 당도가 너무나 확실해졌을 때 마이다네크 절멸 수용소와 다시 문을 열었던 [[헤움노 절멸수용소]]도 폐쇄되었지만, 오로지 아우슈비츠-비르케나우에서는 학살이 계속되었고 1945년 초 [[비스와-오데르 대공세]]로 이미 바르샤바까지 소련군에게 함락되었던 1월 17일에야 힘러는 이 수용소에 폐쇄명령을 내렸다. 이때까지 살아남은 제소자들은 그 추운 겨울에 도보로 이동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미 극도로 쇠약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사망했다. 제소자들을 모두 이동시킨 뒤 SS는 조직적으로 수용소의 시설을 파괴하려고 했지만 이미 소련군이 너무 가까이 와 있었기 때문에 제3 수용소와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건물만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고 비르케나우의 터, 그리고 제1 수용소는 그대로 남아 학살의 물증이 되었다. 수용소가 폐쇄된 지 불과 9일 뒤인 1월 26일 [[소련]]의 [[제1우크라이나전선군]] 제60군이 이 지옥을 해방했다. 이 수용소의 참상을 목격한 이들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. 전선군 사령관 [[이반 코네프]] 원수는 참상에 대해 전해 듣고 그 지옥을 직접 보면 정신에 타격이 가 작전 지휘에도 영향을 끼칠까봐 일부러 수용소에 방문하지 않았다.[* [[미군 ]]도 다를 바 없었다. [[조지 S. 패튼]]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평소 공공연히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서슴치 않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헨발트 수용소의 참상을 목격한 뒤 참지 못하고 구토를 했다고 전해진다.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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